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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정보

일요법회 -법상 스님 -중도

소리-> 듣는 놈

듣는 놈은 순수의식이라 이름한다. 

이 놈은 생각을 멈출 때만 보인다.

생각으로는 가 닿을 수 없다. 

이 놈이 진짜다.

 


저 놈이 나를 괴롭힌다는 내 생각,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괴로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니까 너무나 홀가분하고 좋다. ->홀가분함

돈에 구속되어 있으면 이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게 된다. 

                         


실제로 내가 바깥의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견분이 내 안의 상분을 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여기 있는 내가 바깥에 있는 대상을 파악했어'라고 하지만 지실은

내 안의 견분(보는 부분의 의식)이 내 안의 상분(보여지는 부분의 의식)을 보는 것일 뿐이다.

내가 나를 보는 거다. 내가 해석한 대상을 보는 거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해석, 해석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소리는 좋은 소리도 아니고, 나쁜 소리도 아니고, 그냥 소리일 뿐이다. 

사람을 볼 대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내 머리로 해석해 놓고 해석한 것을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범주화해놓는다.

좋은 것은 가지려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 한다. 여기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바깥 대상에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 내가 힘을 실어줘야 힘이 생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다. 이것 자체로는 힘이 없다. 내가 그 소리에 집착해서 생각하니까 그 말이 힘을 갖는 거다. 그 욕을 흘려버릴 수도 있고, 그 욕을 내가 쥘 수도 있다. 소리는 힘이 없는데 내가 그 욕을 쥐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대사은 환상이다. 의식이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대상을 좋은 쪽과 싫은 쪽으로 범주화 해놓고 좋으면 잡으려 하고, 싫으면 밀어내려 하는데, 이게 잘 안 되니까 괴로운 거다. 

집착하고 버리려는 분별, 분별하는 마음이 괴로움이다. 

집착하는 마음은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해결책은 [중도]다. 

양극단을 버리는 거다. 과도하게 좋아서 집착하는 마음은 허상이다. 

지금 이대로의 삶을 경험해야 한다. 그냥 받아준다. 내버려둔다.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수용한다. 

분별해서 분별을 쫓아가는 삶을 내려놓는다.

지금 벌어진 이대로를 허용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문제가 없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대상과 경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대상, 경계를 좋아할거냐 말 거냐를 분별해서 의식이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문제가 생긴다. 

'나는 가난해', '나는 부자야', '나는 똑똑해', '나는 머저리야' 등 내가 대상과 경계에 해석을 했을 뿐이다. 삶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 다만 내 의식이 '이건 문제야, 저건 문제야'하며 문제를 만들었을 뿐이다.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족하다. 이것으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고가 없으면 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발심을 하지 않게 된다. 


경험되는 삶을 문제 있는 삶이라 해석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이 중도의 삶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경계, 나쁜 경계가 다 부처다. 

취하고 버리려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중도다. 문득 놔 버린 채, 그냥 사는 것.

있는 그대로 관한다. 본다가 ㅈ중도다. 좋게 보거나 싫게 보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게 보는 것이 중생이다. 


이상 법상 스님이 일요법회 법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정리했습니다.